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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도가 치유못할 교회 문제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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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채너티 투데이 한국판에 달라스 윌라드와 손봉호 교수의 대담에 실려서 아래 링크를 붙여서 글을 실어 봅니다.
오늘 살아가는 우리들이 고민하고 꼭 한 번 되 물어야 할 내용입니다.

[기사 내용입니다.]

손봉호 제 소개를 먼저 하겠습니다. 저는 1965년도에 웨스터민스터신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교수님과 마찬가지로 철학과 신학을 모두 공부했지요.

윌라드 1965년도면 제가 위스콘신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교로 옮겨갔을 시기군요.

손봉호 신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네덜란드에서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귀국 후에는 서울대학교에 학생들을 가르쳤지요. 이후에는 사회철학과 사회윤리에 관심을 가졌지요. 5년 전에 대학에서 은퇴했습니다. 제가 교수님보다 1살 어리군요. 올해 74세입니다. 지금은 이런저런 일을 하고 있긴 하지만 주요 관심사는 환경, 사회복지, 정의 같은 사회 이슈입니다.

윌라드 현대 사회에서 무척이나 중요한 문제지요.

손봉호 강의 잘 들었습니다.

윌라드 고맙습니다.

손봉호 오늘은 교수님과 사회복지, 정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크리스채너티투데이 한국판> 독자들이 궁금해 하기도 하고 저도 관심 있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교수님의 지식에 대한 관점이 저와 비슷하다고 하더군요.

윌라드 저와 의견을 공유하는 분을 만나다니 반갑습니다.

손봉호 교수님은 미국뿐 아니라 세계를 통틀어 봐도 상당히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십니다. 목사이자 철학자이면서 대학에서 강의도 하고 계시죠. 제가 아는 사람 중에 교수님 같은 분은 없습니다.

윌라드 저 같은 사람이 흔하지는 않지요. (웃음)

손봉호 철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기독교 목회자의 입장을 잘 헤아리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철학과 신학의 관계에 관한 질문을 자주 받으시지요?

윌라드 비슷한 질문을 끊임없이 받습니다. 사람들은 목회와 철학 간에 부딪히는 지점이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둘 사이에 상충되는 어떤 점도 찾지 못했습니다. 사실 저는 목회자는 지금보다 더 철학적이어야 하고, 철학자는 사람을 보살피는 목회자의 태도를 더 닮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사회가 목회와 철학이 별개라고 믿는 것뿐이지요. 하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목회자와 철학자의 관심사는 동일했습니다.

손봉호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동정녀 탄생, 부활, 삼위일체처럼 이성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가르침이 있습니다. 신앙과 이성간에 갈등을 겪었던 적은 없으십니까?

윌라드 제가 좀 유별난 사람이라 그런지 몰라도 제게 신앙과 이성은 서로를 뒷받침했습니다. 성경에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세상에는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아주 많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삼위일체와 같은 부분을 비이성적이라 하지 않고 이성의 범위를 초월한 것이라고 설명했지요. 삼위일체를 아무리 좁은 의미로 헤아린다고 해도 자기 모순적이거나 논리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삼위가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형이상학이 필요합니다. 형이상학은 전통적으로 교회의 가르침이지요. 오거스틴, 아퀴나스, 칼뱅을 비롯한 여러 신학자가 형이상학을 가르쳤습니다. 어떻게 둘이 하나가 될 수 있는지, 혹은 셋이 하나가 될 수 있는지를 형이상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짧은 시간에 설명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요. 간단히 예를 들어볼까요. 여기 물병 3개가 있습니다. 이 3개의 물병은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물병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인간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관계를 통해 인간은 3명이 하나가 될 수도, 2명이 하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손봉호 한 가지 본질이 된다는 의미인가요?

윌라드 그렇습니다. 세 사람이 하나의 본질이 된다는 것이지요. 본질을 분리하면 사람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손봉호 신앙과 이성은 서로를 보완한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신앙에는 헌신이라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성의 경우에도 그러한가요?

윌라드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알더라도 믿지 않을 수 있지요. 믿음은 개인의 의지와 신뢰가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알더라도 믿지 않을 수 있고, 알지 못해도 믿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욱 바람직한 것은 지식이 뒷받침된 믿음입니다. 위 내용을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로 설명해보지요. 다윗은 믿음으로 행동했지만, 그 행동은 지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사자와 곰으로부터 자신을 지키신 하나님을 경험했기에 기꺼이 골리앗과의 싸움에 나섰지요.

손봉호 다윗은 어떤 초자연적인 힘이 있다고 믿은 것일까요?

윌라드 그렇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양치기 시절 경험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있었기에 처음부터 믿음으로 골리앗에 맞설 수 있었습니다.

손봉호 그렇다면 신앙과 과학의 관계에서, 과학의 한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윌라드 물론 과학은 놀라운 학문입니다. 저는 과학은 유익한 학문이며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 중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과학자는 몇몇 기본적 질문에 답하지 못합니다. 과학자는 현실이 무엇인지, 무엇이 행복한 삶인지, 누가 선한 사람인지, 어떻게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는지와 같은 근본적 질문에는 답을 주지 못하지요.

손봉호 과학자는 삶에 관한 중요한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는 말씀인가요?

윌라드 그렇습니다. 그러나 답을 몰라도 우리는 계속 행동해야 하지요. 문제는 우리에게 지식이 있는지 없는지 여부인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지식이 없다고 대답합니다. 기회, 믿음 등은 있지만 지식은 없다고 하지요. 저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 대한 지식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언제 행복한지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학자가 대답해 줄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요. 이런 질문의 답을 찾으려면 권위와 이성과 경험을 모두 동원해야 합니다.

손봉호 하지만 여전히 리처드 도킨스 교수처럼 삶을 진화의 관점에서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거죠.

윌라드 제 대답은 할 수 있으면 해보라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과학이론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데 아직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손봉호 도킨스 교수의 논리가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윌라드 도킨스 교수는 확실히 결론이 나지 않은 사실을 옳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 의견을 접할 때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태도는 “누구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고 놔두는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여태껏 누구도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데에 성공하지 못했고, 가능하리라는 조짐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생물학이든 무엇이든 과학은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문제를 다루지 않습니다. 과학에는 연구 주제가 있어 이를 연구하고 지식을 제공합니다. 멋진 학문입니다. 하지만 과학은 누가 행복한지, 누가 진정 선한 사람이지에 관해서는 다루지 않죠.

손봉호 그런 행위는 인간이 가진 지식의 조각을 모아 추정하는 것에 불과한가요? 도킨스 교수의 경우, 그분이 소유한 방대한 지식을 연장해서 하나님에 관한 논의에 적용하는 것인가요?

윌라드 그렇습니다. 지식을 합리적으로 적용하지 않으면,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진리로 판명 나도록 지식을 임의적으로 이끌어가게 됩니다. 예를 들어 도킨스 교수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았으면 하는 절실한 소망이 사실이기를 바라면서, 자신이 소유한 한정된 지식을 하나님의 존재 문제에까지 연장해 적용한 것이지요.

손봉호 흥미롭네요.

윌라드 도킨스 교수의 지식은 이성이나 경험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희망하는 바를 진리라고 증명하려는 노력일 뿐입니다.

손봉호 어떠한 상황이든 우리는 아는 바를 행동으로 옮겨야 된다고 하셨는데, 사실 우리의 지식은 불완전하지 않습니까?

윌라드 그렇지요. 많은 경우에 있어 우리가 가진 지식은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저는 한국에 오려고 비행기를 탔습니다. 제가 한국과 비행기에 대한 지식은 있지만, 완전한 지식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한국 방문에서 경험할 일들에 대한 믿음이 없었거나, 혹은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면 비행기를 타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에 바탕을 둔 지식입니다. 이는 성경적 태도일 뿐만 아니라, 이것이 결국 삶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믿음에 바탕을 둔 행함이 삶을 지탱한다고 생각합니다.

손봉호 무엇이 옳은지 알면서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머리로 아는 것과 행동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윌라드 옳은 줄 알면서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것은 우리의 욕망이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옳은지 안다고 해도 우리가 이를 원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행동이 옳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카인은 자신의 욕망에 굴복해 잘못된 행동을 했지요.

손봉호 어쨌든 인간의 삶에서 욕망은 아주 중요하지 않습니까?

윌라드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이 생명을 유지하려면 먹어야 하는 데 우리에게 음식에 대한 욕망이 없다면 먹는다는 것 자체가 고역이겠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욕망을 허락했습니다. 하지만 욕망이 우리 삶을 주도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음식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려고 다른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옳지 않지요. 욕망과 옳은 행동을 잘 조화시켜야 합니다. 여기에서 의지의 역할이 아주 중요합니다. 욕망이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에 초점을 맞춘다면 의지는 무엇이 옳은지를 분별하기 때문이죠. 갈등이 일어나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손봉호 욕망과 의지 사이에 왜 갈등이 일어날까요? 인간의 죄성과 연관이 있다고 보십니까?

윌라드 저는 인간이 하나님과 단절되어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싶습니다. 만일 인간이 스스로의 신이 된다면 자신의 욕망이 행동의 궁극적 기준이겠지요.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인간은 욕망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무엇이 옳은지 분별하게 하는 다른 기준을 갖겠지요. 처음부터 ‘윤리’는 인간이 하고 싶은 행동을 어떻게 자제할 것인가, 하고 싶지 않은 행동을 어떻게 행동하게 할 것인가에 관해 다루어 왔습니다. 하지만 명확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지요.

손봉호 그렇군요. 그리스도인에게 그 기준은 성경의 가르침일 텐데요,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성경의 가르침대로 행동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교수님은 성경이 어떤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윌라드 저는 성경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해석할 때는 매우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제가 해석할 때 사용하는 기준 중에 하나는 빈도수 입니다. 예를 들어 ‘여성은 짧은 머리를 해서는 안된다’는 가르침처럼 성경에 단 한 번 언급된 내용이라면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성경이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는 내용이라면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물론 우리의 삶과 이성도 성경을 해석하는 훌륭한 도구지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성경을 전체적 맥락에서 바라보고 이를 바탕으로 해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손봉호 결국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고 믿는다는 말씀이지요?

윌라드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해석한 모든 성경 내용을 하나님 말씀이라고 믿지는 않습니다. 반드시 성경 전체를 근거로 해석해야 합니다. 적절한 해석을 바탕으로 한 성경 전체가 진리입니다. 성경은 전체로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손봉호 성경 해석 문제는 영원한 숙제이지요.

윌라드 그렇습니다. 그런 문제 때문에 우리가 겸손하게 되지요. 내 의견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나를 낮춰 다른 이의 생각도 들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겸손과 해석, 그것이 사랑공동체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손봉호 그렇지만, 그로 인해 상대주의의 위험성에 빠질 위험도 있지 않을까요?

윌라드 위험은 언제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의견과 성령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균형을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강조하지만, 사랑과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사랑과 겸손이 있다면, 성경 해석에서 야기되는 대부분의 위험은 충분히 제한되거나 고칠 수 있습니다.

손봉호 그러나 자신의 해석에 절대적 확신을 갖는 사람들이 있어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또한 신앙고백과 교리도 있는데, 어느 정도의 교리와 고백을 고수해야 하지 않을까요?

윌라드 교리와 고백은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한 것처럼 지식은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우리가 믿는 교리는 사랑을 짓밟기 위한 것이 아니에요. 사랑은 항상 겸손과 함께 하지요. 사랑과 겸손의 조합은 우리가 해석할 때 독단의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안전하게 지켜줍니다. 자신의 해석에 절대적 확신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결국은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게 될 것입니다.

손봉호 철학자로서 저는 때로 성령에 대해 의문이 듭니다. 성령을 이성으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님께서는 성령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윌라드 저는 성령이 하나님의 개인적인 임재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은 우리와 개인적으로 소통하실 뿐 아니라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움직이신다고 믿습니다. 그렇지만 성령은 말씀으로 소통하기를 가장 선호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경험을 통해 아는 것처럼 성령의 목소리도 경험하며 알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령이 말씀하시면 저절로 알아차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의 목소리를 듣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배울 수 있습니다. 성령은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믿지 않는 자에게도 말씀하세요. 그들이 모를 뿐이지요.

손봉호 성령이 말씀하시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윌라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성령이 말씀하시는 내용을 성경과 비교해 보십시오. 성령이 말씀하시는 것인지 잘 모르겠으면 다시 여쭈어보세요. 야고보도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고 권면합니다. 성령과 우리는 대화 할 수 있는 관계입니다. 성령은 아주 온화하실 뿐더러 인내로 우리를 대하십니다. 제가 사람들에게 권하는 다른 방법은 성령께 직접 가르쳐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어린 사무엘은 하나님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엘리 대제사장이 부르는 소리인줄 알고 3번이나 대제사장에게 가서 자기를 불렀냐고 물었지요. 결국 대제사장이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우리도 성령께 이렇게 요청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굉장히 크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의 목소리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목소리를 잘 듣지 못하지요.

손봉호 개인적으로 성령을 경험한 적이 있으신가요?

윌라드 물론입니다. 수도 없이 많이 경험했습니다. 성령은 제게 말씀으로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법으로 다가오셨습니다. 성경을 공부할 때, 설교준비나 상담을 하기 위에 묵상할 때는 대개는 말씀으로 오십니다. 그러나 때로는 예고 없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때로는 구체적 행동을 지시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성령은 그저 우리와 대화하기 위해 오시기도 합니다. 어떤 행동 지침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을 말씀하러 오시기도 합니다.

손봉호 저는 자주는 아니지만, 한 달에 약 2번 정도 설교를 합니다. 특정 본문을 정하고 읽고 해석하며 설교를 준비해도 적절한 주제가 생각나지 않으면, 기도를 합니다.

윌라드 저도 그렇게 합니다. 그게 자연스러운 행동입니다. 하나님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듣고자 하는 자세지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 준비를 할 때 저는 종종 모든 일을 멈추고 “하나님 제가 어떤 말씀을 전하길 원하십니까? 말씀하소서”하고 여쭙니다. 그러면 성령이 택하신 독특한 방법으로 거의 대답을 받습니다. 저와 마찬가지로 손교수님도 이를 경험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손봉호 그런데 제가 그런 이야기를 다른 철학자에게 하면 철학자답지 못하다는 말을 듣곤 합니다.

윌라드 그런 사람들에게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에 대해 알고 싶습니까? 하나님을 믿습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저와 대화하려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이유를 막론하고 대화하지 않으려 하기도 하지만요. 누군가 철학자답지 못하다고 저를 비난한다면, 저는 제 경험을 따를 뿐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당신도 성령을 직접 경험해본 후에 스스로 결정하라는 말을 건네지요.

손봉호 저는 때로 그리스도인이 아닌 철학자들에게, “나는 모든 인간의 생각을 상대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철학을 더 잘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말합니다. 근본을 둘 시작점이 있기 때문이지요.

윌라드 물론입니다. 저는 동료 철학자들에게 제 관점이 궁금하면, 한번 시도해보라고 말합니다. 직접 시도해보면, 하나님이 만나줄 것이라고요.

손봉호 최근 한국 신학계에 다원주의가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윌라드 제가 말하는 기독교 다원주의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다가올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을 찾을 것이라는 의미지요. 이것이 제가 가르치는 다원주의의 핵심입니다. 이는 달리 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구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도 되지요. 저는 그리스도가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고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하나님께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찾는 사람은 누구든 예수를 만날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어느 누구에게도 “당신은 구원받았으니 괜찮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구원의 문제는 하나님과 그 사람간의 문제이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이 알고 계십니다. 혹시 증오로 가득 찬 사람이나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지 못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구원받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손봉호 그리스도에 대한 의식적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가요?

윌라드 역사 속의 그리스도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손봉호 네, 역사적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윌라드 중요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없는 어린아이도 하나님이 받아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우리가 세상에 널리 알려야 하는 아주 중요한 사실이기는 합니다. 왜냐하면, 그 지식을 통해서만이 사람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공급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에 대해 전혀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인데요. 그런 사람들의 경우도,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알고 계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구한다면 찾을 것입니다. 다원주의는 복음이 아니에요. 복음은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왔고, 그를 믿음으로서 천국나라의 문에 들어설 수 있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손봉호 제가 다원주의를 거부하는 이유는 구원이라는 개념이 종교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불교와 기독교는 구원에 대해 같은 용어를 사용하지만 전혀 다른 개념을 갖기 때문에 상충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윌라드 그렇습니다. 종교 다원주의 신학자 존 힉(John Hick) 교수는 그리스도 외에도 하나님께 이를 수 있다고 합니다. 이치에 맞지 않는 주장이지요. 서로 다른 종교는 서로 매우 다릅니다. 다원주의는 어떤 면에서 모든 종교가 같다고 말하는데 논리적으로 터무니없는 주장입니다.

손봉호 다른 종교는 개념적으로 다르다는 말씀입니까?

윌라드 그렇습니다. 다릅니다. 각기 다른 종교들을 한번만 들여다보면 바로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보편구원론의 관점에서 말하는 다원주의도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주장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재앙이에요. 그리스도를 찾기 위해서는 구해야 합니다.

손봉호 그리스도 이외에 하나님에게 이를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해도 좋다는 자유를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윌라드 그렇습니다. 그런 자유로는 하나님을 구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길 잃은 영혼은 자신이 어디 있는지도 모릅니다.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이 그런 상태에요. 자신이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손봉호 지금까지 신학적 질문을 주로 드렸는데, 이제 실제적인 문제를 다뤄보겠습니다. 현재 한국 교회는 엉망입니다. 한국 교회에 희망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미국 교회 상황은 어떤가요?

윌라드 한국 교회 상황이 그렇다니 안타깝네요. 미국 교회도 엉망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웃음) 해답은 간단합니다. 교회에 제자도가 없기 때문이지요. 제자도가 고치지 못하는 교회 문제는 없습니다. 제자가 되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교회와 관련된 모든 문제는 그리스도인이 제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야기된 것입니다.

손봉호 단순한 교인과 제자를 어떻게 구별하나요?

윌라드 보통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믿음을 고백한 사람이라고 알고 있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믿는다고 고백하면 사후에 천국에 간다고 들었기 때문에, 종종 믿지도 않는 것을 고백합니다. 엄청난 비극이지요. 제자는 어떻게 해야 예수처럼 살아갈 수 있는지 그리스도로부터 배우는 학생이며 도제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제자가 아닙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미 믿음을 고백했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그리스도인으로서 더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배우려 하지 않아요. 간단한 예로, 미국에서 문제가 된 교회 헌금 수준은 한심할 지경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10%는커녕, 2%도 안 돼요. 교회 자체가 힘든 상황이라 정작 도와야 할 사람을 돕지 못합니다. 왜 이런 문제가 생기겠습니까? 모두 제자도의 부재 때문입니다.

손봉호 한국 그리스도인은 세계 어떤 그리스도인보다 헌금을 많이 합니다.

윌라드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손봉호 문제는 동기입니다. 소위 ‘도 우트 데스’ (Do ut des, “내가 이만큼 했으니, 당신도 내게 이만큼 해달라”는 뜻의 라틴어/역주) 원칙을 동기로 한 경우가 많지요. 비도덕적 행동으로 성취한 재정적 풍요를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한다거나,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해서 축복받았다고 말합니다.

윌라드 유감이지만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씨앗 믿음(seed faith)’이라는 것을 설교하는 목회자도 있어요. 일정 금액을 드리면, 그것이 씨앗이 되어 후에 수확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이지요. 말도 안 되는 가르침입니다.

손봉호 최근 한국에서 「하나님을 팝니다」(죠이선교회 역간)라는 책이 출간됐습니다. 제목이 충격적이었지만, 내용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습니다.

윌라드 성경은 남의 것을 탐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남의 것을 탐하면 우상숭배와 탐욕이 야기되지요. 그리고 이런 것들이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듭니다. 전통적 기독교의 가르침은 자기를 버리라는 것입니다. 삶의 목적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재정적 풍요를 누리기 위해 노력하는 삶은 기독교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물론 부요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목표는 아닙니다.

손봉호 한국 교회의 신학은 소위 번영, 성공 신학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윌라드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서도 번영신학이 가장 인기입니다. 큰 문제에요. 번영신학은 예수님을 닮는 것, 하나님 나라에서 사는 것과 같이 진정으로 중요한 진리로부터 사람들을 멀어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손봉호 현재 우리 경제 체제가 탐욕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요?

윌라드 사람들은 그렇게 이야기하지요.

손봉호 우리가 사회주의로 가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자본주의를 반대합니다.

윌라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보다 문제가 더 많습니다.

손봉호 자본주의 체제 속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윌라드 자본은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한 것이지 자신의 탐욕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웨슬리는 “벌 수 있는 한 벌고, 저축할 수 있는 한 저축하고, 나눌 수 있는 한 나누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제가 한 가지 덧붙인다면, 벌어서 소유했다면, 그 소유를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본을 소유하기만 하지 말고, 사업 등을 통해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섬기는 데 자본을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섬길 수 있는 한 섬기고, 나눌 수 있는 한 나누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본주의 자체는 소유의 형태를 규정하는 시스템일 뿐, 근본적으로는 탐욕과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올바른 마음으로 자본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탐욕의 지배를 받기 쉽지요. 후대 학자들이 자본주의를 헌정한 자본주의의 귄위있는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를 볼까요. 그는 도덕이 자본주의를 다스려야 한다고 믿었고, 자본도 하나님의 지배 아래에 놓여야 한다고 믿었던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손봉호 그 점이 바로 간과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윌라드 그렇습니다. 우리는 책임감 있게 행동하도록 부름 받았고, 자본주의는 우리가 책임 있게 행동할 수 있는 하나의 형태입니다.

손봉호 한국은 과거에 상당히 빈곤했지만 이제 굶주림에서는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빈부격차, 북한 문제와 같이 많은 빈곤과 연관된 문제가 산적해 있습니다. 물론 세계적으로도 아프리카 기근과 같은 문제가 있지요. 개인적으로 저는 이런 문제에 그리스도인이 나서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윌라드 사람들은 자선으로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큰 잘못입니다. 자선은 결코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요. 사람들을 가르치고, 조직하고, 가능한 자원을 공급하는 도움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전 세계에서 널리 볼 수 있는 한 가지 아름다운 예가 있는데, 여성에게 소액자본을 대출해주는 제도입니다. 대출받은 여성은 대출자금을 반드시 상환할 뿐만 아니라 자영업으로 재정 독립을 이루고, 주변 사람을 돕기까지 합니다. 이런 일에 더욱 많은 투자가 이뤄져야 해요. 미국에서 가장 큰 사회 부조리는 교육입니다. 젊은이들이 길거리에서 마약을 팔고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갑니다. 교육이 실패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기독교가 교육에 영향을 못 미치고 있어요.

손봉호 물고기를 줄 것이 아니라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치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교회가 이 문제를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요?

윌라드 교회가 실패한 중요한 이유는 교회가 교육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교회가 제자를 길러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손봉호 제자의 특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윌라드 그리스도를 점점 닮아가며 자라가는 모습이 제자의 표식입니다. 쉽게 화내거나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가족과 주위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자신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지속적으로 자라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저는 나이가 들수록 하나님과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깨닫습니다. 젊었을 때 얼마나 무지했는지 놀랄 때가 많아요. 가장 가까운 이웃인 가족조차도 어떻게 사랑하는지 몰랐으니까요.

손봉호 개인적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저는 한국교회 부패 척결에 관심을 갖고 싸우고 있습니다. 저를 보고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다른 사람을 미워하거나 화를 내면 안 된다면서 질타를 해요. 그렇지만 심각한 부패를 보면 참기가 힘듭니다.

윌라드 분노를 즐기시는 건 아닙니까? (웃음) 화가 나는 것은 문제를 개인적으로 받아들여서 자신의 의지로 해결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화를 내서 해결될 일이라면, 화를 내지 않으면 더 잘 해결할 수 있지요.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께 내어드리고 최선을 다하되, 나의 최선이 최고라고 믿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맡겨야 해요. 그렇게 분노의 짐을 덜면, 상황을 더 잘 보고 더 잘 행동할 수 있습니다. 분노가 죄는 아니지만, 죄를 저지르게 쉽게 만들지요. 분노는 두통 같은 것입니다. 두통이 죄는 아니지만, 불필요한 것 아닙니까? 두통은 무엇인가 잘못 됐음을 알려주는 징후지요. 수면이 부족하거나 신체상에 어떤 문제가 있다고 경고해주지만, 바람직한 증상은 아니지요. 분노가 바로 그렇습니다.

손봉호 저는 때로 부패에 연관된 목회자를 다른 사람들 앞에서 비판하기도 합니다.

윌라드 판단은 분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치과의사가 썩은 이빨을 분별하는 것은 판단이지만, 비난이 섞인 판단은 아니지요. 입니다. 치아 치료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의사한테 우리는 “무슨 소리하는 겁니까!”라고 반박하지 않잖아요? 하지만 치과의사가 제 뺨을 때리며 “어떻게 이 지경이 되도록 치아 관리를 안 하셨습니까?”한다면 그것은 비난이지요. 비난하지 않고 분별할 수 있습니다. 비난 없는 분별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큰 자유입니다. 물론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것은 필요한 행위입니다. 분별은 중요합니다. 분별은 사랑이 내포한 책임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의사가 썩은 치아를 썩었다고 알려주는 것은 사랑의 행위입니다. 부패를 보고도 모든 것이 괜찮다는 식으로 덮어두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나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달라스 윌라드 • 인터뷰 손봉호 phh79@ctkore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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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자 없는 교회의 생명력을 우려하는 달라스 윌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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