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역설 (고전 1:18)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독교를 상징하는 것 가운데 가장 으뜸을 뽑으라면 십자가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그렇게 흠모할 대상이 아니었다. 십자가는 가장 악한 자를 처벌하는 도구였고, 사람이 고안한 사형 도구 중 가장 악랄한 도구였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수치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누구나 부끄럽게 생각하고 피하고 싶어하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받은 사람이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도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이 저주받은 사람으로 보여 졌다. 그런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따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무엇보다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는 죄몫으로 십자가에 처형한 사람들이 유대인이었다. 그런 점에서 십자가는 결코 예수님 당대 사람들에게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십자가는 역설이다.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십자가는 연약하고 수치스러운 형벌이다. 결코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니다. 미련해 보이며 피할 것이다. 그런데 성도에게, 구원받은 사람에게 십자가는 자랑감이다. 죄로 인해 죽어 마땅한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사랑이며, 은혜이며, 감사이다.

동시에 십자가는 능력을 경험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바울은 자신의 질병이 치유되기를 위해 기도했다. 세 번씩이나 기도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응답은 치유가 아니라 질병을 가진 채 살라는 것이었다. 이유가 있었다. 연약함이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들고, 그 연약함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자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 되심을 경험할 수 있는 자리이다. 그러니 역설이다.

십자가의 능력과 은혜는 새로운 관점을 요구한다. 은혜는 일반적인 관점, 세상 사람의 관점으로 보면 보이지 않는다.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세상의 능력과 힘의 논리로 이해할 수 없다. 세상 방식과 가치관을 내려놓아야 한다. 모든 것을 내려놓는 자리가 십자가이다. 자신의 생명까지 내려놓는 것이다. 그래야 그 세계는 열리고, 내려놓고 난 후에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다.

십자가는 새로운 삶을 배우는 곳이다. 십자가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예수님의 삶을 배운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을 초청하셨다. 그리고 내게로 와서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다. 죄의 짐을 지고 힘들어하는 모든 사람을 초대하신다. 죄의 짐을 십자가에서 벗겨주시고, 주님의 멍에를 주님과 함께 지고 가는 길이 믿음의 길이다.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주님의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하셨다. 나 혼자 당하라고 내 버려두지 않으시고 주님이 나와 함께 그 멍에를 매주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보고 따라오라고 하신다. 보여주시고 배우라고 하신다. 섬김을 배우고 하나님 방식으로 사는 것을 배우는 곳이다.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과 능력으로 사는 것을 배우는 자리이다. 나를 비우고 은혜를 채우는 삶을 배우는 곳이다.

십자가는 풍부에도 처할 줄 알고 비천에도 처할 줄 아는 비결을 배우는 곳이다. 자족의 삶이 행복한 삶인 것을 배우는 곳이다. 미련해 보여도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이 지혜임을 배우는 곳이다. 다시 십자가로 돌아간다. 다시 십자가를 붙잡는다. 다시 십자가만을 바라본다. 다시 십자가의 의미가 내 안에 회복되길 소망한다. 다시 십자가만 자랑하며 살기를, 증거하며 살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