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욥 8:20)

(욥 8:20)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시므로

사람마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있다.
기록된 말씀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된다.
지식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실까 생각한다.
이것만으로는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지식적인 이해이기 때문이다.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삶에서 경험하는 것이다.
이론이 아니라 진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직접 체험하는 것이다.

빌닷은 자신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근거로 욥을 판단한다.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인 이해가 모아지면 균형잡힌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만든다.
모자이크를 하듯 하나님에 대한 여러사람의 이해를 모자이크 할 수 있어야 한다.
공동체적으로 이해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살아가는 환경이 다양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다르며, 추구하는 바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환경에서 다양하게 말씀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모자이크 하면서 건강한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묻어 나는 것이다.

경험한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모은다고 하여 주관적 하나님의 이해가 옳다는 말은 아니다.
주관적인 경험이 객관화 되는 것은 성경의 말씀을 통해 증명될 때이다.
말씀을 통한 하나님 이해가 내 삶에 경험되는 것은 객관을 주관적 환경에서 재확인 하는 과정이다.
객관을 그대로 지식적으로 내버려두면 이론적 이해에 머물 수 있다.
그래서 객관적 진리를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일이 꼭 필요하다.

전제할 것이 있다.
하나님을 이해하는 우리들의 이해가 유한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시다.
유한은 무한을 담을 수 없다.
객관적 진리를 많이 이해하고 아무리 많은 경험을 하여도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 없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교만할 수 없는 이유이다.
하나님을 다 아는 것처럼 이해하고 주장하는 것은 자만이다.

유한한 우리들이 무한을 이해해 갈 때 필요한 것이 공동체의 이해이다.
객관을 통해 경험한 주관을 모자이크 해야 하는 이유이다.

욥을 향하여 권면하는 빌닷의 주장이 옳은 듯 하지만 문제가 주관을 객관화하는 것이다.
자신의 이해를 가지고 모든 사람에게 적용하는 것이다.
인간의 한계는 자신의 이해가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틀이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관점을 벗어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않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시는 것이 분명하다.
객관적 진리이다.
그러니 항상 하나님이 이대로 이루시는 것 같다.
성경이 인간에 대한 가르침이 무엇인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죄인들로서 형벌 아래 있는 것이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형벌을 피해갈 수 없다.

그러니 이 객관적 진리는 옳은 듯 하지만 하나님이 인간을 대하시는 방법을 생각할 때 수정이 불가피하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들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죄값을 치르심으로 우리들이 비로소 의롭다 칭해지는 길이 열린 것이다.
나를 위해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믿고 신뢰할 때 의로워지는 길이 열린다.
칭의를 맛보고도 여전히 우리들 안에는 죄가 남아 있다.
그렇다면 빌닷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들은 모두 하나님의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는데 끝까지,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그 사랑, 십자가의 은혜가 오늘의 나를 있게 하는 근거이다.
십자가 그 사랑이 다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준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붙들어 주심을 구하는 근거이다.

말씀을 통한 하나님 이해가 중요하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은 그분을 맛보아 아는 것이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을 맛보아 알기를 소망한다.
공동체를 주신 이유가 무엇인지 돌아본다.
하나님에 대한 나의 이해가 형제의 믿음에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소망한다.
오히려 내 삶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통로가 되길 간구한다.